이 글은 『물리경제학 시대선언』(윤종원·윤소리·윤준) 제8장 (2) 중반부입니다. 저자의 물리경제학 가설을 담은 학술적 서술이며, 본문·수치·인용은 원고 그대로입니다.
5단계 각각이 어떤 시기인지
| 단계 | 약호 | 명칭 | 본질 | 분야별 시간 척도 |
|---|---|---|---|---|
| 1 | D | 요인 (Determinants) | 압력이 잠복적으로 누적 | 별 수십억 년, 인체 수십 년, 경제 5–10년 |
| 2 | T | 시작 (Trigger) | 보상 발동, 미래 자산 동원 시작 | 분야별 다양 |
| 3 | D | 봉쇄 (Dual Blockade) | CAM 신호봉쇄와 DLT 물리 통로 봉쇄 동시 작동 | 짧음 (수개월) |
| 4 | M | 발현 (Manifestation) | 손상이 외부 관찰 가능 형태로 표면화 | 짧음 (수개월) |
| 5 | C | 궤멸 (Collapse) | 시스템 종료, 새 사이클 진입 | 분야별 다양 |
의학 도메인에서의 발견
DTDMC는 사실 의학 도메인에서 처음 발견된 법칙입니다. 노화와 만성질환의 공통 경로를 추적하던 작업이 5단계의 모양을 드러내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짚고 가겠습니다. 분과 의학에서는 동맥경화, 만성 신부전, 당뇨 합병증, 알츠하이머, 골다공증을 각각 따로 진단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5가지 병의 표면 뒤에 똑같은 한 가지 분자 사건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발견이 5단계 정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 안에서 흐르는 매개체는 칼슘 이온입니다. 인체 칼슘의 99퍼센트는 뼈에 저장되어 있고, 혈액 안에는 데시리터당 8.8밀리그램에서 10.4밀리그램이라는 매우 좁은 범위 안에서만 유지됩니다. 통로는 지름 100마이크로미터(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분의 1) 이하의 미세혈관입니다. 사람 몸의 혈관 약 10만 킬로미터 가운데 대부분이 여기에 속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체의 모든 세포가 큰 혈관이 아니라 미세혈관과 직접 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산소도, 영양도, 호르몬도, 면역 세포도 모두 미세혈관을 거쳐서야 세포에 도달합니다. 미세혈관이 막히면 그 너머의 세포는 곧바로 굶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미세혈관 안에 굳어 흐름을 막는 침착물은 미세석회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린다 데머와 야 틴투트는 2008년 학술지 서큘레이션에 한 편의 종합 검토 논문을 실어, 혈관 석회화가 단순한 노화의 산물이 아니라 능동적인 광물화 과정이라는 사실을 분자 수준의 증거로 정리했습니다. 광물화 과정이란 세포가 칼슘과 인 같은 무기질을 결합시켜 단단한 결정을 만드는 작용입니다. 미세혈관 벽에서 칼슘과 인이 결합해 미세 결정이 만들어지는 사건은 임상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진행됩니다. 표준 영상이 잡아내지 못하는 미세 단계에서 이미 5단계의 본체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몸 안에서 5단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요인(1단계)에서는 결핍, 염증, 산증, 저산소 4가지 트리거가 일상 안에서 잠복적으로 누적됩니다. 영문 첫 글자를 묶어 DIAH라고 부릅니다. 시작(2단계)에서는 누적된 트리거가 임계를 넘는 순간, 부갑상선호르몬(혈중 칼슘 농도를 높이는 작용을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뼈에서 칼슘이 유출됩니다. 봉쇄(3단계)에서는 유출된 칼슘이 미세혈관 벽에 미세석회로 굳어 통로를 좁히고, 동시에 혈중 칼슘 농도의 출렁임 때문에 세포 안의 칼슘 신호도 흔들려 신호 통로까지 함께 막힙니다. 발현(4단계)에서는 미세혈관 봉쇄가 7가지 형태로 표면화됩니다. 막힘과 파열, 둔화, 신호 차단, 굳음, 과증식, 단절, 구조 붕괴입니다. 궤멸(5단계)에서는 다장기 부전이 진행되어 사망에 이릅니다.
이 5단계가 정말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의학 문헌의 교차 확인으로 거듭 검증되었습니다. 동맥경화에서 보이는 칼슘 침착, 만성 신부전에서 보이는 이소성 석회화(본래 칼슘이 굳어서는 안 될 조직에 칼슘이 침착되는 현상), 당뇨병에서 보이는 미세혈관 손상, 알츠하이머에서 보이는 뇌혈관 칼슘 침착. 분과 의학에서는 이 4가지를 따로 진단해 왔지만, 분자 수준에서 들여다보면 모두 한 가지 사건의 변주임이 광범위한 문헌에서 확인됩니다. 분과 의학이 분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보지 못했던 공통 경로를 5단계가 드러낸 셈입니다.
그런데 5단계가 의학에서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한 가지 의문을 남겼습니다. 같은 5단계가 의학 바깥의 다른 분야에서도 작동할까. 그 답은 별과 강과 생태계와 기후를 차례로 들여다보는 자연 시스템 검토에서 풀립니다.
세상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는 붕괴 법칙
같은 5단계가 분야를 넘어 작동한다는 사실은 자연과학과 생명과학 문헌의 교차 확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매개체와 통로와 침착물의 이름은 분야마다 다르지만, 5단계의 구조 자체는 어김없이 보존됩니다. 별과 강과 생태계와 기후가 무너지는 길은 모두 같은 5단계의 같은 순서를 따릅니다. 한 분야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별입니다. 별의 죽음은 5단계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례를 보여 줍니다. 별의 핵에서 흐르는 매개체는 핵융합 연료, 곧 수소와 헬륨입니다. 통로는 별 중심부의 압력 구배, 곧 중심으로 갈수록 압력이 높아지는 차이입니다. 침착물은 핵융합 결과로 누적되는 무거운 원소입니다. 요인(1단계)에서 수소가 수십억 년에 걸쳐 천천히 고갈됩니다. 시작(2단계)에서 핵의 수소 농도가 임계 아래로 떨어지면 외피의 수축과 가열이라는 보상 반응이 발동됩니다. 봉쇄(3단계)에서 핵융합이 멈추고 중력이 압도하는 두 축의 붕괴가 일어납니다. 발현(4단계)에서 별이 적색거성(외피가 크게 부풀어 표면 온도가 낮아진 상태)으로 팽창하고 표면 변화가 가시화됩니다. 궤멸(5단계)에서 초신성 폭발이나 백색왜성으로 수렴합니다. 무너짐에 수십억 년이 걸리지만, 5단계의 순서 자체는 사람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노화와 똑같습니다.
다음은 강입니다. 강의 죽음은 별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같은 순서를 보여 줍니다. 강에서 흐르는 매개체는 물이고, 통로는 하상, 곧 강바닥이며, 침착물은 토사입니다. 요인(1단계)에서 강수량 부족과 무리한 취수가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됩니다. 시작(2단계)에서 가뭄이 임계를 넘어 지하수 의존이라는 보상 반응이 발동됩니다. 봉쇄(3단계)에서 수원이 고갈되고 하상이 침적되는 두 축의 붕괴가 함께 일어납니다. 발현(4단계)에서 하천이 마르고 어종이 폐사하는 현상이 가시화됩니다. 궤멸(5단계)에서 유역 생태계 자체가 붕괴합니다. 1960년 이후 구소련의 무리한 관개 사업으로 말라 버린 아랄해가 5단계 전체를 한꺼번에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입니다.
생태계의 붕괴도 같은 5단계의 같은 순서를 따릅니다. 매개체는 영양 흐름이고, 통로는 먹이사슬과 종 사이의 연결이며, 침착물은 외래종의 정착이거나 핵심종의 소멸입니다. 요인(1단계)에서 서식지 파괴와 환경 오염이 누적됩니다. 시작(2단계)에서 핵심종 개체 수가 임계 아래로 떨어지며 영양 흐름이 교란되기 시작합니다. 봉쇄(3단계)에서 영양 공급과 종 사이 연결이 동시에 끊어집니다. 발현(4단계)에서 종 다양성이 급감하는 현상이 관찰됩니다. 궤멸(5단계)에서 기존 생태계가 붕괴하고 다른 체제로 전환됩니다.
기후 시스템의 붕괴도 같은 궤도 위에 있습니다. 매개체는 탄소 순환이고, 통로는 산림과 해양과 습지의 흡수원이며, 침착물은 대기에 누적되는 이산화탄소입니다. 요인(1단계)에서 산업혁명 이후 약 250년에 걸쳐 온실가스가 누적됩니다. 시작(2단계)에서 임계 농도를 돌파하며 기후 시스템의 이상 반응이 시작됩니다. 봉쇄(3단계)에서 바다와 숲의 흡수 능력이 약화되고 대기 순환계가 무너지는 두 축의 붕괴가 함께 진행됩니다. 발현(4단계)에서 극단적 기상 이변이 속출합니다. 궤멸(5단계)에서 임계 전환(시스템이 다른 안정 상태로 급격히 옮겨 가는 사건)을 넘어 새로운 기후 체제로 진입합니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의 팀 렌턴과 동료 연구진이 2008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 실은 한 검토 논문은 그린란드 빙상과 서남극 빙상과 아마존 열대우림을 비롯한 지구의 임계 요소들을 식별하면서, 대기 중 탄소 누적이 일정 한도를 넘으면 비가역적, 곧 한번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정리했습니다.
매개체와 통로와 침착물의 이름이 분야마다 다르지만 구조 자체는 같습니다. 무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십억 년부터 수십 년까지 천차만별이지만 5단계의 순서 자체는 모든 분야에서 그대로 보존됩니다. 별의 죽음과 강의 마름과 생태계의 붕괴와 기후의 전환이 같은 한 가지 법칙 위에서 진행된다는 사실, 이 자체가 5단계가 보편 법칙의 자격을 갖추는 가장 묵직한 근거입니다.
자연 시스템 네 분야의 5단계 매개체 매핑
| 구조 | 별 | 강 | 생태계 | 기후 |
|---|---|---|---|---|
| 매개체 | 핵융합 연료 | 물 | 영양 흐름 | 탄소 순환 |
| 통로 | 중심부 압력 구배 | 하상 | 먹이사슬 | 산림·해양·습지 흡수원 |
| 침착물 | 무거운 원소 | 침적 토사 | 외래종 정착 | 누적 이산화탄소 |
| 시간 척도 | 수억–수십억 년 | 수십 년 | 수십–수백 년 | 수백 년 |
| 궤멸 양상 | 초신성·백색왜성 | 유역 붕괴 | 체제 전환 | 임계 전환 |
경제 분야에 적용되는 5단계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같은 보편 법칙이 한 나라의 경제에서는 어떤 모양으로 작동하는가. 매개체와 통로와 침착물의 위치에 어떤 경제 항목이 들어서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작업이 사실 이 책 전체의 출발점이며, 이 절은 그 작업을 짧게 정리한 부분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 안에서 흐르는 매개체는 현금입니다. 현금은 모든 거래의 매개체이며, 가계와 기업과 정부 사이의 모든 흐름을 가능하게 합니다. 통로는 가계의 가처분소득에서 동네 가게의 매출로 이어지는 자금 경로입니다. 큰 자금 경로, 곧 대기업과 금융기관 사이의 흐름과, 작은 자금 경로, 곧 가계와 자영업자 사이의 흐름이 큰 흐름에서 작은 흐름으로 위에서 아래로 이어져 있습니다. 골목 단위의 가게까지 닿아야 비로소 한 바퀴가 완성됩니다. 통로 안에 굳어 흐름을 막는 침착물은 매월 가처분소득에서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원금은 다시 회수가 가능한 자원이지만 이자는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이자가 사람의 몸 안의 미세석회와 똑같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매개체와 통로와 침착물의 구조 위에서 5단계가 차례로 작동합니다.
요인(1단계)에서는 경제 안에 압력이 잠복적으로 누적됩니다. 거시 지표는 정상으로 보이지만 시스템 안쪽에서는 부담이 깊어집니다. 일반 시민의 일상으로 보면 이런 모양입니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가 조금씩 오릅니다. 신용카드 사용액이 매월 조금씩 늘지만 아직 한도는 넉넉합니다. 동네 가게의 손님이 조금씩 줄어들지만 사장님은 "날씨 탓이려니" 하고 넘깁니다. 청년이 학자금 대출을 받지만 "취업하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내놓아도 시장은 별 반응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아 보이지만, 시스템 안쪽에서는 빚과 비용과 양극화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시기입니다. 잠복의 길이는 5년에서 10년쯤이 보통입니다. 1990년부터 1996년 사이 한국에서 단기 외화 차입이 7년에 걸쳐 누적된 사례, 2001년부터 2007년 사이 미국에서 가계 부채가 6년에 걸쳐 누적된 사례,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자산 가격에 의존한 성장이 약 7년 동안 누적된 사례. 모두 같은 시간 흐름을 보입니다. 이 책은 이 누적 구조를 깔때기론이라 부릅니다.
요인 단계에서 누적된 압력은 깔때기 출구에서 4가지 트리거로 수렴합니다. 결핍(Divergence,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로 가용 유동성이 한쪽으로 쏠림), 고비용(Inflationary cost, 임금과 원자재와 금융 비용의 동시 상승), 고물가(Asset acidosis, 자산 가격이 본래의 가치 기초를 크게 초과해 시스템이 산성화됨), 돈맥경화(Hypoxia of liquidity, 유동성이 정체되어 거래와 신용 창출이 마비됨)입니다. 의학 도메인에서 결핍, 염증, 산증, 저산소가 칼슘 유출의 트리거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경제에서는 이 4가지 상태가 비상금고 인출의 트리거로 작동합니다. 매개체가 칼슘이냐 현금이냐만 다를 뿐, 트리거의 구조는 거의 정확히 같습니다.
시작(2단계)에서는 누적된 트리거가 임계를 넘는 순간 시스템이 비상 자원을 꺼내는 보상 반응을 발동합니다. 이 책은 이 단계의 학술 정식을 유출론이라 부릅니다. 인체에서는 뼈에서 칼슘이 유출되는 작용이고, 한 나라의 경제에서는 가계와 기업과 정부가 대출을 받아 이자가 발생하는 작용입니다. 매개체가 칼슘에서 현금으로 바뀌었을 뿐 동작은 같습니다. 일반 시민의 일상으로 보면 이런 모양입니다. 월급으로 생활이 안 되니 적금을 깹니다. 적금이 바닥나니 마이너스 통장에 손을 댑니다. 마이너스 통장 한도가 차니 카드론을 받습니다. 그래도 부족하니 부모님 댁에 손을 벌리거나 친척에게 돈을 빌립니다. 하나씩 미래의 자원을 끌어다 현재를 막는 것입니다. 자영업자는 사내 유보금을 사용하고, 기업은 단기 차입을 늘립니다. 국가는 외환보유고를 풀거나 긴급 재정을 투입합니다. 미래 자산을 미리 동원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몸 안의 칼슘 유출과 정확히 같은 위치를 차지합니다. 동원된 자원의 일부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매월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가 한계 가계와 한계 기업과 지방 신용 부문에 침착되어 통로를 좁히기 시작합니다. 한국의 1997년 외환보유고가 1년 사이에 332억 달러에서 39억 달러로 줄어든 사건,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자산이 2007년 9월 약 8,700억 달러에서 2008년 12월 약 2조 2,000억 달러로 부풀어 오른 사건. 모두 이 시작 단계의 두 얼굴입니다. 비상금고가 줄어드는 흐름과 부풀어 오르는 흐름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본래 기능이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사건입니다.
봉쇄(3단계)에서는 침착이 임계를 넘어 자금 통로의 양 축이 동시에 좁아집니다. 이 책은 이 단계의 학술 정식을 이중봉쇄론이라 부르며, 봉쇄의 강도를 B* = CAM × DLT라는 곱셈식으로 정식화합니다. 두 종류의 봉쇄가 함께 걸립니다. CAM 기능작동 신호봉쇄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려도 시장이 반응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일상에서 떠올리면, 정부가 "내수를 살리겠다"고 발표해도 골목 가게의 매출에는 변화가 없는 상태입니다. 정책이 큰 자금 경로, 곧 대기업과 금융기관 사이까지는 도달하지만 작은 자금 경로의 말단인 가계와 자영업자에게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누적된 부채 이자로 거의 다 빠져나가면, 정책 신호가 도달해도 가계는 새로운 빚을 낼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책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DLT 물리 통로 봉쇄는 이자 침착이 자금 경로의 반경 자체를 좁힌 상태입니다. 시중에 돈이 풀렸다고는 하는데 정작 동네 가게의 통장에는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그것입니다. 신호가 도달해도 돈이 지나갈 길이 없는 셈입니다. 두 봉쇄가 동시에 걸리는 순간 보상할 길 자체가 사라집니다. 한쪽만 걸려 있다면 시스템은 다른 쪽으로 보상하면서 버티지만, 두 봉쇄가 동시에 진행되면 시스템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섭니다.
발현(4단계)에서는 봉쇄의 결과가 거시 지표로 표면화됩니다. 이 책은 이 단계의 학술 정식을 7M론이라 부릅니다. 일반 시민의 눈에는 갑자기 모든 것이 동시에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입니다. 어느 날 거래은행이 "한도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고 통보하고, 한 달 사이 일하던 회사가 갑자기 명예퇴직을 권고합니다. 그동안 잘 팔리던 동네 상가가 줄줄이 비기 시작하고, 들어 둔 펀드의 평가액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신문 1면이 매일 위기 기사로 채워집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5년에서 10년 동안 안에서 진행되어 온 손상이 한꺼번에 표면으로 솟구친 것입니다. 7가지 손상 형태가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폐열은 자본시장의 급성 경색이고, 둔화는 경기 침체와 고용 악화이며, 피폐는 정책 신호 무반응, 경화는 규제 경직과 구조개혁 실패, 범파는 자산 거품, 단절은 공급망 붕괴와 지방 소멸, 붕괴는 체제 위기 직전의 구조 붕괴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7가지 형태가 사람의 몸 안의 7가지 임상 패턴과 정확히 1대1로 대응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발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1998년 한국 GDP가 5.5퍼센트 역성장을 기록하고 실업률이 두 배로 치솟은 사건, 2008년 9월 미국 인터뱅크 시장(은행과 은행 사이에 단기로 자금을 빌리고 빌려주는 시장)의 완전한 동결, 2009년 미국 실업률이 5퍼센트에서 10퍼센트로 두 배가 된 사건. 모두 발현 단계의 표면화입니다.
궤멸(5단계)에서는 발현이 이어지고 외부의 도움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면 시스템 자체가 종료됩니다. 일반 시민의 일상으로 보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규칙으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시작됩니다. 통장에 든 화폐의 가치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 다르게 매겨지고, 평생 일해 모은 자산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기도 합니다. 1997년 12월 3일 한국이 IMF와 580억 달러 구제금융에 합의한 것, 2008년 10월 미국 의회가 7,000억 달러 부실자산 매입 프로그램(TARP)을 승인한 것, 2020년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무제한 양적완화(중앙은행이 채권과 같은 자산을 사들여 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에 들어간 것. 모두 궤멸 직전의 외부 개입입니다. 외부 개입이 늦거나 부족하면 시스템은 화폐 단위 변경, 정부 형태 교체, 산업 생태계 재편이라는 가장 가혹한 길로 들어섭니다. 1923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인플레이션, 2001년 아르헨티나의 디폴트(정해진 기일에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 불이행 상태)와 페소 평가절하, 2008년 짐바브웨의 화폐 붕괴. 모두 궤멸 단계의 결말입니다. 그러나 별의 잔해에서 다음 별이 태어나듯이, 한 시대의 경제 체제가 무너진 터에서 다음 시대의 경제 체제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한국 경제도 1997년 위기 뒤에 새로 짜인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해가 빨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