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물리경제학 시대선언』(윤종원·윤소리·윤준) 제4장 (1) 앞부분입니다. 저자의 물리경제학 가설을 담은 학술적 서술이며, 본문·수치·인용은 원고 그대로입니다.
단일 지표라는 체온계, 사후 보고서라는 부검 결과지, 대동맥을 경유하는 처방. 지금까지 살펴본 3가지 어긋남은 같은 자리에서 한 가정을 공유합니다. 250년간 경제학을 지배해 온 보이지 않는 손, 곧 시장이 알아서 균형을 잡는다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이 살아 있는 한 위기를 미리 잡으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에서 한국의 자영업자들이 사전 경고 없이 정통으로 충격을 맞은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1996년에 가게를 연 한국 식당 자영업자의 30년이 이 4번의 충격을 차례로 통과한 시간이며, 그 30년이 이 장과 다음 장의 안내자가 됩니다.
의문이 따라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가정이 이렇게 강력하게 유지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250년 동안 경제학자들이 이 가정을 흔들지 못한 까닭은, 시장이 알아서 균형을 잡는다는 명제를 대신할 보편 법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 경제 안에서만 작동하는 법칙이라면 가설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경제와 무관해 보이는 자연 곳곳에서 같은 법칙이 의심할 수 없이 작동한다면, 그 법칙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닙니다. 우주적 보편 법칙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 답을 찾아 한 걸음 경제 밖으로 나갑니다. 강이 흐르는 이유, 별이 빛나는 이유, 비가 내리는 이유는 모두 같은 물리 법칙 아래에서 일어나며, 한 나라 경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같은 법칙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 법칙의 이름이 기울기입니다.
기울기는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닙니다. 150년 전부터 물리학이 다루어 온 원리이며, 다만 경제학과 기상학과 환경학이 각자의 전문 용어 안에 따로 가두어 둔 원리입니다. 이 장의 목표는 이 원리를 일상 언어로 풀어내어, 자연과 경제 시스템이 같은 법칙 위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 드리는 일입니다. 기울기 법칙이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250년 묵은 가정이 왜 흔들리는지 또렷해지고, 다음 장에서 다룰 한 나라 경제 안의 흐름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같은 법칙이 강과 별과 경제 시스템 안에서 똑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위기의 근본 원인이 통계 숫자의 이상 이전에 흐름과 기울기의 물리적 사건이라는 결론의 우주적 근거이기도 합니다. 책 제목이 물리경제학의 시대인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1996년에 식당을 연 자영업자는 자기 가게가 어떤 보편 법칙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가게는 일터였고 생계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게가 흐름의 보편 법칙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은 1997년에 흐름이 멈추기 시작한 시점에 드러났습니다. 그때는 그 법칙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 장에서 함께 그 법칙을 살펴봅니다.
차이가 있어야 움직인다
자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 자체에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두 지점 사이에 높이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사라지는 순간, 곧 바다에 도달한 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수량이 줄어서가 아닙니다. 태평양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담겨 있지만, 수면의 높이가 균일하기 때문에 한 방울도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임의 전제는 물의 양이 아니라 위치의 차이입니다.
전기도 같습니다. 전류는 전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1.5볼트 건전지에 꼬마전구를 연결하면 불이 켜지지만, 두 극의 전압이 같아지는 순간 전류는 사라지고 전구는 꺼집니다. 건전지 안에 남은 화학 에너지가 0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두 극 사이의 전위 차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열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운 커피 잔에서 손으로 열이 전달되는 이유는 커피에 온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커피와 손 사이에 온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커피 온도가 손 온도와 같아지는 순간 열의 흐름은 멈춥니다. 바람이 부는 이유도 기압이 높은 곳과 낮은 곳 사이의 기압 차이이고, 소금물과 민물이 맞닿았을 때 물이 삼투압으로 이동하는 이유도 두 용액의 농도 차이입니다.
이 단순한 원리를 물리학에서는 기울기라고 부릅니다. 수학적으로는 두 지점 사이 물리량의 차이를 거리로 나눈 값이지만, 일상 언어로는 한 단어로 충분합니다. 기울기는 차이입니다. 모든 자발적 흐름은 이 차이에서 시작됩니다.
한 가지 짚어 둘 점이 있습니다. 기울기는 에너지 그 자체가 아닙니다. 에너지가 있어도 기울기가 없으면 흐름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깊고 넓은 호수에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면 높이가 균일하다면 그 에너지는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기울기는 에너지가 일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조건입니다. 에너지의 크기가 아니라 차이의 존재가 흐름을 결정합니다.
이 원리는 우주 전체에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항성이 빛을 내는 이유도 중심부와 표면의 온도 차이이고, 태양풍이 불어오는 이유도 태양 열권과 성간 공간의 압력 차이이며, 지구 해류가 순환하는 이유도 적도와 극지방 사이의 열적 차이입니다. 차이가 있으면 움직이고, 차이가 없으면 멈춥니다. 자연 어디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흐름 시스템이 공통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어떤 흐름이든 에너지·기울기·매개체 세 요소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에너지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위한 기반입니다. 강에서는 태양이 만든 비와 중력이고, 전기 회로에서는 전지의 화학 에너지이며, 한 나라 경제에서는 중앙은행이 만들어 내는 통화 정책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못합니다.
기울기는 그 에너지가 흐름으로 전환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에너지가 아무리 많아도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두 지점 사이에 차이를 가질 때에만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매개체는 실제로 움직이는 실체입니다. 강에서는 물, 전기 회로에서는 전자, 한 나라 경제 안에서는 자금과 물류와 신용, 폐와 조직 사이에서는 산소가 매개체입니다. 매개체 없이는 흐름이 구체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에너지·기울기·매개체 세 요소가 함께 작동할 때에만 흐름이 성립합니다. 에너지가 기울기를 만들고, 기울기가 매개체를 움직이며, 매개체의 이동이 시스템을 유지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 관계를 흐름의 삼항 구조라고 부릅니다.
흐름의 삼항 구조: 자연·인체·국가 경제 공통 문법
| 영역 | 에너지 | 기울기 | 매개체 | 흐름의 형태 |
|---|---|---|---|---|
| 강 | 태양·중력 | 고도 차이 | 물 | 강물 흐름 |
| 전기 회로 | 전지·발전기 | 전압 차이 | 전자 | 전류 |
| 기상 | 태양 복사 | 기압·온도 차이 | 공기·수증기 | 바람·강수 |
| 인체 혈관 | 심장 수축 | 압력 차이 | 혈액 | 혈액 순환 |
| 국가 경제 | 통화 정책 | 자금 압력 차이 | 현금 | 자금 순환 |
이 표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매개체가 달라도 원리는 하나입니다. 강이 흐르는 원리, 전구에 불이 켜지는 원리, 한 사람의 피가 도는 원리, 국가의 자금이 도는 원리는 겉모습이 다르게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시스템입니다. 모두 에너지가 기울기를 만들고, 기울기가 매개체를 움직이며, 매개체가 시스템을 유지합니다. 어느 하나에서 기울기가 사라지는 순간 매개체의 움직임이 멈추고, 시스템은 평형으로 수렴합니다. 자연에서 평형은 곧 죽음입니다.
에너지·기울기·매개체 삼항 구조가 책 전체의 문법입니다. 한 나라 경제 안에서 위기가 시작되는 지점, 정책이 도달하지 못하는 구간, 가게가 무너지는 국면은 모두 삼항 구조의 어느 한 축이 무너지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 더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단순한 법칙을 명확하게 다루기 위한 다섯 어휘입니다.
흐름의 문법: 익혀야 할 다섯 단어
지금까지 살펴본 법칙은 단순합니다. 차이가 있어야 흐름이 있고, 흐름이 있어야 시스템이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법칙을 명확하게 다루려면 플럭스·침착·비선형 민감도·이중봉쇄·임계점 다섯 단어가 필요합니다. 다섯 단어는 책 전체에서 반복해 등장하므로, 한 번씩 눈에 익혀 두면 다음 장에서 만날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암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섯 단어가 다시 등장할 때 이 뜻이었지 하고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면 충분합니다.
플럭스: 흐름의 양
플럭스는 단위 시간 동안 단위 면적을 통과하는 매개체의 양입니다. 쉽게 말해 흐름의 크기입니다. 기울기가 차이라면, 플럭스는 그 차이가 실제로 만들어 내는 흐름 그 자체입니다.
강물에 비유하면 단순해집니다. 강의 양 끝 지점 사이의 고도 차이가 기울기이고, 그 강에서 매분 흐르는 물의 양이 플럭스입니다. 같은 폭의 강이라도 기울기가 두 배가 되면 플럭스도 두 배로 커집니다. 노르웨이 태생의 미국 물리화학자 온사거가 1931년에 정식화한 비평형 열역학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플럭스는 기울기에 비례합니다. 기울기가 사라지면 플럭스도 사라집니다.
한국과 미국 경제에서도 같은 관계가 작동합니다. 중앙은행과 시장 사이의 금리 차이가 자금 압력 기울기이고, 그 차이를 따라 매월 시장으로 풀려나가는 자금의 양이 자금 플럭스입니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소득 차이가 소비 기울기이고, 그 차이를 따라 매년 도시 간으로 흐르는 물류의 양이 물류 플럭스입니다. 기울기가 떨어지면 플럭스도 함께 떨어집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정책 금리를 사실상 0퍼센트로 끌어내렸을 때, 자금 압력 기울기가 사라지면서 자금 플럭스도 함께 멈춰 골목까지 닿지 못한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침착: 돌아오지 않는 흔적
침착은 통로 안쪽 벽에 비가역적으로 쌓이는 축적물을 가리킵니다. 욕조에 쌓인 묵은 때, 수도관 안의 녹, 강바닥에 쌓인 토사가 침착의 사례입니다. 한 번 굳어 자리 잡은 침착물은 자연적으로는 다시 풀리지 않습니다. 끓는 물도, 시간도, 휴식도 침착을 자발적으로 제거하지 못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의학 사례가 혈관 석회화입니다. 미국의 한 연구진이 2008년 미국심장학회의 써큘레이션 학술지에 발표한 검토 논문은 혈관 벽의 석회화가 단순한 콜레스테롤 축적이 아니라 뼈 형성과 유사한 능동적 과정임을 종합 정리했습니다. 일단 성숙 단계로 진입한 침착은 자발적으로는 풀리지 않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범위를 확장합니다.
한 나라 경제에서 침착에 해당하는 것은 부실 채권과 한 번 계약된 대출이자입니다. 가게에 한 번 굳어 붙은 부채와 매월 빠져나가는 대출이자는 시간이 지난다고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채가 가게 안에 쌓이면 쌓일수록, 그 가게에서 다시 흐름을 만들어 내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침착의 핵심 특성은 비가역성입니다. 침착은 시스템이 자기 과거를 물리적으로 기억하는 방식이고, 그 기억은 다음 위기의 취약 경로로 작동합니다. 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수년에 걸친 침착의 누적이 표면화된 결과입니다.
비선형 민감도: 살짝 좁아져도 큰 차이
비선형 민감도는 입력의 미세한 변화가 출력의 거대한 변화를 만드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기울기 시스템에서 가장 대표적인 법칙이 푸아죄유 법칙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의사 푸아죄유는 가는 관 안을 흐르는 액체의 흐름량이 관 반지름의 네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1846년에 정식화했습니다. 단순한 비례가 아니라 네제곱 비례입니다. 통로의 반지름이 절반으로 좁아지면 흐름량은 16분의 1로 떨어집니다. 통로가 60퍼센트만 좁아져도 흐름량은 거의 99퍼센트 사라집니다. 이것이 비선형 민감도입니다.
한 나라 경제에서도 같은 비선형 민감도가 작동합니다. 가게로 들어오는 자금 통로가 절반으로 좁아질 때 가게가 받는 자금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게 아닙니다. 16분의 1로 줄어듭니다. 정책 금리를 0퍼센트로 끌어내려도 골목 가게의 매출이 회복되지 않는 물리적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거시 통로는 열려 있어도 미시 통로가 좁아져 있으면, 거시의 큰 변화가 미시에 도달할 즈음에는 거의 사라집니다. 본 저자가 한국과 미국의 690개월 데이터에서 확인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중봉쇄: 한 군데 막히면 버티고, 두 군데 막히면 무너진다
이중봉쇄는 한 시스템에서 두 군데 통로가 동시에 막히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한 군데만 막힌 경우와 두 군데가 동시에 막힌 경우는 결과가 정반대입니다.
한 도시의 상하수도를 떠올리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깨끗한 물이 들어오는 상수도 한 군데만 막힌 경우, 도시는 비축된 물로 며칠 버틸 수 있습니다. 사용된 물이 빠져나가는 하수도 한 군데만 막힌 경우, 도시는 임시로 물 사용을 줄이고 견딥니다. 그러나 상수도와 하수도가 동시에 막히면, 도시는 며칠도 버티지 못합니다. 들어올 물도 없고, 나갈 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중봉쇄는 한 나라 경제 안에서 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본 저자가 한국과 미국의 690개월 데이터로 검증한 결과, 한쪽 통로만 막힌 단일봉쇄 2건에서는 경제 시스템이 모두 버텼습니다. 자금이 들어오는 통로가 막혔거나 빠져나가는 통로가 막혔거나 둘 가운데 하나만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두 통로가 동시에 막힌 이중봉쇄 4건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경제가 모두 무너졌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 4건 모두 동시 봉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