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물리경제학 시대선언』(윤종원·윤소리·윤준) 제8장 (1) 앞부분입니다. 저자의 물리경제학 가설을 담은 학술적 서술이며, 본문·수치·인용은 원고 그대로입니다.
인체와 한 나라 경제가 같은 설계도 위에 있다는 등식이 성립하면, 한 가지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같은 설계도라면, 무너지는 순서도 같을까. 인체가 건강을 잃어 가는 과정에 정해진 차례가 있다면, 국가 경제가 위기로 빠져드는 과정에도 같은 차례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짚고 갈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큰 위기를 맞을 때마다 "갑자기 이렇게 됐다"고 말합니다. 어느 날 받은 진단서를 보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라고 합니다. 어느 분기에 매출이 무너진 사장님은 "작년까지는 괜찮았는데"라고 합니다. 어느 날 결혼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부부는 "몇 달 전까지는 그래도 살 만했는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를 오래 지켜보고, 회계사가 가게 장부를 들여다보고, 가족 상담사가 부부의 시간을 거슬러 따라가 보면 거의 같은 사실이 발견됩니다. 그 "갑자기"는 사실 갑자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단서에 적힌 그 병은 5년 전부터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고, 무너진 매출은 3년 전부터 손님이 줄고 있었으며, 부부의 균열도 오래전부터 작은 다툼으로 쌓여 오고 있었습니다. 겉에서 보면 멀쩡해 보였지만 안에서는 이미 정해진 차례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정해진 차례, 곧 무너짐의 길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과학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한 가지 답을 내놓아 왔습니다. 19세기 중반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1865년에 한 줄짜리 법칙을 정리했습니다. 외부에서 충분한 에너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결국 흐트러진다는 명제입니다. 일상에서 이 법칙은 어디서나 작동합니다. 따끈한 커피를 식탁에 그냥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식어 갑니다. 식은 커피가 다시 저절로 따뜻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깨끗이 정리해 놓은 책상도 며칠만 지나면 어지러워지지만, 어지러워진 책상이 저절로 정리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몸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지, 어제보다 오늘이 더 젊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 한 줄의 법칙이 별의 죽음부터 사람의 노화까지 거의 모든 무너짐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칙에는 한 가지 큰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흐트러진다"는 사실은 알려 주지만, 어떤 단계를 거쳐서 어떻게 흐트러지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건강을 잃어 가고 있다고 합시다. 결국 어디로 가는지(쇠약과 죽음)는 이 법칙으로 알 수 있지만, 첫 신호가 언제 나타나는지,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이어지는지, 어느 시점이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시다. 결국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지금이 어느 단계인지, 다음에는 무엇이 닥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출발지와 도착지는 표시되어 있지만 그 사이의 길은 텅 비어 있는 옛 지도와 같은 셈입니다. 과학에서는 이렇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는 영역을 흔히 블랙박스라고 부릅니다. 무너짐의 방향은 알아냈지만 그 안의 차례는 오랫동안 블랙박스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이 소개하려는 도구가 바로 그 블랙박스를 여는 작업입니다. 운전을 떠올려 봅시다. 출발지와 도착지만 적힌 옛 지도만 가지고 운전하면 길에서 헤매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도구가 네비게이션입니다. 네비게이션은 한 가지를 더 알려 줍니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어떤 길을 거쳐, 어디서 좌회전하고, 어디서 우회전하고, 어느 길은 막혔으니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보입니다. 그동안 인류가 가진 무너짐의 지도가 옛 지도였다면, 이제 소개할 도구는 네비게이션에 해당합니다. 어느 단계에서 도로가 좁아지기 시작하는지, 어느 갈림길에서 두 길이 동시에 막히는지, 어디서부터 한 방향으로만 가속되어 돌아올 수 없는지를 한 단계 한 단계 짚어 주는 도구입니다. 이 네비게이션의 이름이 DTDMC입니다.
DTDMC는 무너짐의 5단계를 정리한 법칙입니다. 5단계의 영문 머리글자를 모은 이름입니다. 요인(Determinants), 시작(Trigger), 봉쇄(Dual Blockade), 발현(Manifestation), 궤멸(Collapse). 1단계는 압력이 조용히 쌓이는 시기, 2단계는 그 압력이 한계를 넘어 비상 자원을 끌어 쓰기 시작하는 시기, 3단계는 2가지 길이 동시에 막혀 더는 보상할 방법이 사라지는 시기, 4단계는 안에서 진행되던 손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시기, 5단계는 시스템이 종료되거나 외부 도움으로 가까스로 멈춰 서는 시기입니다. 이 5단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어떤 분야에서 무너지는가와 상관없이 같은 차례로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별이 죽을 때, 강이 마를 때, 사람의 몸이 늙어 갈 때, 한 나라의 경제가 위기를 맞을 때, 모두 같은 5단계를 같은 순서로 따라갑니다. 무엇이 흐르고 어디를 지나가느냐는 분야마다 다르지만, 무너지는 차례 자체는 어김없이 보존됩니다. 그리고 이 책이 DTDMC를 비유가 아니라 보편 법칙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자료 351개월, 미국 자료 339개월, 합쳐 690개월의 매월 자료를 한 달도 빠뜨리지 않고 점검한 결과, 이 법칙은 없는 위기를 있다고 잘못 알린 적도, 진짜 위기를 놓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30년에 걸친 자료가 한 가지 결론을 가리킵니다. 5단계는 비유나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구조 법칙이라는 사실입니다.
시스템 붕괴를 다룬 거대 이론은 여럿 있었지만, 정작 무너지는 차례를 짚어 주는 이론은 없었습니다. DTDMC는 그 빈틈을 채우는 법칙이며, 같은 5단계가 의학에서 처음 발견된 뒤 별과 강과 생태계와 기후에서 똑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한 나라의 경제에서도 같은 구조로 작동합니다. 한국과 미국의 장기 데이터가 그 근거입니다.
기존 법칙이 답하지 못한 빈틈
도입에서 짚은 클라우지우스의 1865년 논문을 조금 더 들여다봅니다.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그해에 한 편의 논문에서 자연 안에 흐르는 거대한 방향을 한 줄로 정리했습니다. 시스템이 바깥에서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면 그 안의 무질서는 점점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 한 줄이 가지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별의 죽음부터 사람의 노화까지, 거의 모든 무너짐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가 이 한 줄 안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나 도입에서 이미 짚었듯이 이 법칙은 어떤 차례로 무너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 주지만 어떤 길로 가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 셈입니다.
한 세기 반쯤 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복잡계 과학은 또 다른 질문에 답했습니다. 복잡계 과학은 여러 요소가 서로 얽혀 있어서 미리 예측하기 어려운 출렁임을 보이는 현상을 다루는 비교적 젊은 분야입니다. 네덜란드의 학자 마틴 셰퍼와 동료 연구자들은 2009년 학술지 네이처에 한 편의 논문을 실어, 시스템이 큰 변화를 앞두고 어떤 사전 신호를 보내는지를 정리했습니다. 한번 휘청이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부쩍 시간이 걸리고, 그 흔들림의 폭도 점점 커지는 모습이 위기 직전에 나타난다는 흥미로운 발견입니다. 다만 이 이론은 임계점(한 번 넘으면 시스템이 다른 상태로 옮겨 가는 한계 지점)이 어디에 있고 그 앞에 어떤 신호가 보이는지는 짚어 주지만, 시스템이 그 임계점에 어떻게 다다랐는지, 어떤 길을 거쳤는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시점은 짚지만 길은 짚지 않는 셈입니다.
경제 분야로 넘어와 보면, 미국의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는 1986년 자신의 책 '불안정한 경제의 안정화'에서 또 다른 답을 제시했습니다. 안정된 시절에 빚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빚이 어느 선을 넘는 순간 위기가 터진다는 통찰입니다. 흔히 금융 불안정성 가설이라고 부르는 이 견해는 경제 시스템 안에서 내부의 축적이 어떻게 위기로 번지는지를 잘 설명합니다. 다만 한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이 가설은 경제라는 한 분야 안에서만 통합니다. 의학이나 기후나 생태계로 가져가면 곧바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다루는 분야가 좁고, 따라가는 경로도 짧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을 더 짚고 가야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루트비히 폰 베르탈란피는 1968년 자신의 책 '일반 시스템 이론'에서 가장 큰 그림 차원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모든 시스템에는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있고,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있으며, 환경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는 공통된 원리를 정리한 것입니다. 학문 분야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큰 틀이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시스템이 무너질 때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따라 무너지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원리는 있는데 단계가 비어 있는 셈입니다.
이 네 이론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느 방향으로 무너지는가, 어느 시점에 임계가 오는가, 한 분야 안에서 축적이 어떻게 위기로 번지는가, 시스템 일반의 원리는 무엇인가. 네 질문에는 모두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풀리지 않은 질문이 셋 남아 있습니다. 무너질 때 어떤 단계 다음에 어떤 단계가 오는가. 그 순서가 별과 인체와 경제를 가리지 않고 똑같은가. 어느 단계가 돌아올 수 없는 전환점인가. 이 세 질문에 답하는 보편 법칙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DTDMC는 바로 그 빈틈을 채우는 법칙입니다. 그렇다고 기존 네 이론과 다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가는 위치에 섭니다. 클라우지우스가 가리킨 무너짐의 방향과 똑같은 방향을 따라갑니다. 셰퍼가 짚은 임계점은 5단계 가운데 3단계, 곧 봉쇄가 본격적으로 걸리는 지점에 정확히 놓입니다. 민스키가 말한 부채의 축적은 1단계, 곧 요인 단계 안에 들어옵니다. 베르탈란피가 그린 시스템 일반의 큰 틀 위에 무너짐의 구체적 경로가 얹히는 식입니다. 기존 이론을 새 위치에 놓아 주고, 비어 있던 칸을 채우는 작업이 함께 일어나는 셈입니다.
DTDMC가 채우는 빈틈, 기존 거대 이론과의 비교
| 이론 | 답하는 질문 | 답하지 않는 질문 |
|---|---|---|
| 열역학 제2법칙 | 어느 방향으로 무너지는가 | 어떤 순서로 무너지는가 |
| 임계 전이 이론(셰퍼) | 임계점이 어디에 있고 어떤 사전 신호가 있는가 | 임계점까지의 전체 경로 |
| 금융 불안정성(민스키) | 경제 안에서 내부 축적이 어떻게 위기로 가는가 | 경제 외 분야에 적용되는가 |
| 일반 시스템 이론(베르탈란피) | 시스템 일반의 원리는 무엇인가 | 시스템이 무너질 때의 구체 경로 |
| DTDMC | 어떤 순서로 무너지고, 분야를 넘어 어떻게 같은 형식인가 | 해당 없음 |
DTDMC 5단계의 큰 틀
5단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무엇이 흐르고 어디를 통해 흐르고 무엇이 굳어 흐름을 막느냐와 상관없이 같은 모양을 유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은 이 3가지를 각각 매개체, 통로, 침착물이라고 부릅니다. 매개체는 흐르는 것 자체이고, 통로는 그 흐름이 지나가는 길이며, 침착물은 그 길에 끼어 흐름을 좁히는 찌꺼기입니다. 별에서는 핵융합 연료가 흐르고, 사람의 몸에서는 칼슘이 흐르고, 한 나라의 경제에서는 현금이 흐릅니다. 흐르는 것의 이름은 분야마다 다르지만, 5단계의 모양 자체는 그대로 보존됩니다. 그래서 같은 한 가지 법칙이 별과 사람의 몸과 경제를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단계들이 일상 안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떠올리면서 5단계 각각이 어떤 시기인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1단계는 요인입니다. 압력이 잠복적으로, 곧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차곡차곡 쌓이는 시기입니다. 시스템 안쪽에서는 부담이 깊어지고 있지만 겉에서 보면 여느 때와 똑같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이 단계를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매일 야근이 이어지고 있지만 본인은 아직 "괜찮다"고 말하는 시기가 요인 단계입니다. 통장 잔고가 조금씩 줄어들고는 있지만 아직 카드는 정상으로 사용 가능한 시기, 부부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잦아지지만 아직 식탁에서 대화는 이어지는 시기, 부모님이 "별일 아니다"라며 한두 가지 약을 새로 드시기 시작한 시기. 모두 요인 단계의 모습입니다. 거시 지표는 모두 안정적이고, 그 시스템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위기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잠복의 길이는 분야마다 차이가 큽니다. 별의 핵에서는 수십억 년, 사람의 미세혈관에서는 수십 년, 한 가정에서는 5년에서 10년, 한 나라의 경제에서도 5년에서 10년쯤이 보통입니다. 길이는 다르지만 잠복이 끝나는 순간 시스템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사실은 모두 같습니다.
2단계는 시작입니다. 누적된 압력이 어느 한계, 곧 임계를 넘는 순간 시스템은 비상 작용을 시작합니다. 임계란 한 번 넘으면 시스템이 다른 방향으로 가속되는 한계 지점을 가리킵니다. 이 보상 반응의 본질은 한 가지로 모입니다. 미래의 자산을 녹여 현재의 위기를 막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이 단계는 분명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야근이 한계를 넘으면 한 사람은 "일단 이번 프로젝트만 끝내자"며 휴가를 미루고 비축해 둔 체력을 끌어 씁니다. 가계가 빠듯해지면 적금을 깨거나 마이너스 통장에 손을 댑니다. 부부 사이가 본격적으로 흔들리면 한쪽이 "내가 참자"며 감정의 비축분을 끌어 쓰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이 큰 병원에서 처음 검사를 받기 시작하는 시점도 같은 단계입니다. 모두 미래에 쓸 자원을 미리 끌어 와 지금의 위기를 막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별은 중심부 압력이 임계를 넘으면 외피를 수축시키고 가열합니다. 사람의 몸은 혈중 칼슘 농도가 흔들리면 부갑상선호르몬(혈중 칼슘 농도를 높이는 작용을 하는 호르몬)을 분비해 뼈에서 칼슘을 끌어냅니다. 한 나라는 외환이 부족해지면 외환보유고를 풀고 가계는 비상 저축을 깨뜨립니다. 분야는 달라도 동작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 동원이 늘 부산물을 남긴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동원된 자원의 일부는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굳어 통로를 좁히기 시작합니다.
3단계는 봉쇄입니다. 5단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결정적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두 종류의 봉쇄가 동시에 걸립니다. 좀 어려운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일상에서 이해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1번째 봉쇄는 신호 차원의 봉쇄입니다. 정식 이름은 CAM(Conductance Attenuation Metric, 기능작동 신호봉쇄)입니다. 시스템 안의 명령이 말단까지 전달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일상에서 떠올리면, 회사에서 사장이 새 방침을 발표해도 현장 직원에게는 도무지 전달되지 않는 상태,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리 말해도 자녀의 귀에 닿지 않는 상태, 정부가 정책을 내놓아도 골목 가게의 사정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태가 신호 봉쇄에 해당합니다. 2번째 봉쇄는 물리 차원의 봉쇄입니다. 정식 이름은 DLT(Deposition-induced Luminal Throttling, 물리 통로 봉쇄)입니다. 매개체가 흐르는 길 자체가 좁아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일상에서 떠올리면, 아무리 좋은 일감이 들어와도 사람이 부족해 처리할 수 없는 상태, 본인은 일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상태, 돈이 시중에 있긴 한데 정작 가게의 통장으로는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물리 통로 봉쇄에 해당합니다.
두 봉쇄 가운데 한쪽만 걸려 있으면 시스템은 다른 쪽으로 보상하면서 어떻게든 버팁니다. 신호가 안 통하면 다리품을 팔아서라도 메시지를 전달해 보고, 길이 좁아지면 다른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러나 두 봉쇄가 동시에 걸리는 순간이 옵니다. 신호도 안 통하고 길도 막히면 보상할 방법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때부터 신호가 약해지면 기능이 떨어지고, 기능이 떨어지면 길이 더 좁아지고, 길이 더 좁아지면 신호가 더 약해지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한 번 약해진 것이 더 큰 약해짐을 부르고, 그것이 또 더 큰 약해짐을 부릅니다. 일단 이 악순환에 들어서면 시스템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섭니다.
4단계는 발현입니다. 봉쇄의 결과가 마침내 시스템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입니다. 안에서만 진행되던 손상이 거시 지표로, 임상 증상으로, 가시적 사건으로 표면화됩니다. 일상에서 이 단계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건, 한 가정이 마침내 "우리 이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식탁, 한 회사가 처음으로 직원 명단에서 사람을 줄이기 시작하는 분기, 한 나라의 신문 1면이 매일 위기 기사로 채워지는 시기. 모두 발현 단계의 모습입니다. 그동안 안에서만 조용히 진행되던 손상이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손상은 한 가지 모양이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펼쳐집니다. 막힘, 둔화, 신호 차단, 굳음, 과증식, 단절, 구조 붕괴 같은 형태가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책은 이 7가지 손상 형태를 7M이라 부릅니다. 일곱 개 모두 영문 첫 글자 M으로 시작해서 7M입니다.
5단계는 궤멸입니다. 발현이 이어지고 외부에서 충분한 도움이 들어오지 못할 때, 시스템 자체가 종료되는 시기입니다. 일상에서 이 단계는 가장 가혹한 모양으로 다가옵니다. 한 사람이 결국 세상을 떠나는 사건, 한 가정이 결국 흩어지는 결정, 한 회사가 결국 문을 닫는 날, 한 나라의 화폐가 결국 새로 발행되거나 정부 형태가 바뀌는 시기. 모두 궤멸 단계의 결말입니다. 별은 초신성으로 폭발하거나 백색왜성(핵융합 연료가 고갈된 별이 남기는 작고 차가운 잔해)으로 식어 갑니다. 사람의 몸은 다장기 부전(여러 장기가 동시에 기능을 잃는 상태)을 거쳐 사망에 이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궤멸이 끝이 아니라 새 사이클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별의 잔해에서 다음 별이 태어나고, 한 시대의 경제가 무너진 터에서 다음 시대의 경제가 시작됩니다. 한 가정이 흩어진 뒤에 그 안의 사람들이 새 인생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무너짐이 곧 다음 시작이라는 사실이 5단계의 마지막 무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