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원전 서재2026.07.0325분 읽기조회 10

왜 우리는 약을 평생 먹어도 낫지 않는가

의학이 보지 못한 빈 층

D
DTDMC Lab 연구소
DTDMC 연구소
이 글은 『물리의학의 시대 선언』(윤종원) 제1장 전문입니다. 저자의 물리의학 가설을 담은 학술적 서술로, 현재 처방받는 약을 임의로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수치·인용은 원고 그대로입니다.
검사 수치는 내려도 병은 낫지 않는다: 약이 다루는 것과 본체 사이의 빈 층
검사 수치는 내려도 병은 낫지 않는다: 약이 다루는 것과 본체 사이의 빈 층

한 사람을 떠올려 봅시다. 60대 후반의 어머니입니다. 12년 전 처음 고혈압 진단을 받았고, 그때부터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같은 알약을 한 알 드십니다. 지난 8년 동안은 그 알약이 두 알이 되었고, 5년 전에는 콜레스테롤약이 한 알 더해졌으며, 작년부터는 당뇨약 한 알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식탁 위 작은 약통에는 알약 다섯 알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어머니는 한 알도 거르지 않으십니다. 의사는 칭찬합니다. 약을 잘 챙겨 드시고 계세요. 그러나 어머니의 혈압은 여전히 높고, 작년 검사에서 콜레스테롤은 다시 올라갔고, 당화혈색소는 7을 넘었습니다.

진료실을 나서며 따라간 자녀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약 효과가 좋아진다고 하시던데 더 좋아지신 것 같으세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으시다가 답하십니다. 글쎄. 아침에 일어나면 더 무겁고, 계단을 올라갈 때 숨이 더 차고, 손발이 더 차다는 것밖에는 모르겠다. 자녀는 한 번 더 묻습니다. 그럼 약은 도대체 왜 드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한참 후에 답하십니다. 의사가 먹으라니까. 안 먹으면 더 나빠진다니까.

여기에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매일 약을 다섯 알씩 챙겨 드시는데도, 어머니는 점점 나빠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약을 잘 드신다고 칭찬하고, 검사실의 숫자도 약을 먹기 전보다는 좋아 보이는데, 어머니의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12년 전에는 매일 한 알이면 충분했던 약이 지금은 다섯 알로 늘어났고, 다섯 해가 더 지나면 일곱 알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자녀들은, 그 약을 어머니가 평생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딘가에서 직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어머니가 매일 드시는 약들이, 사실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아니라 검사실의 숫자만 낮추는 약이기 때문입니다. 혈압약은 혈관 자체를 회복시키지 않고, 그저 혈압이라는 숫자만 낮춥니다. 콜레스테롤약은 혈관 벽의 손상을 멈추지 않고, 그저 혈중 콜레스테롤이라는 숫자만 낮춥니다. 당뇨약은 인슐린에 대한 세포의 둔감함을 회복시키지 않고, 그저 혈당이라는 숫자만 낮춥니다. 약을 끊으면 숫자가 다시 올라가는 것은 그 약들이 본체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체는 그동안에도 천천히 진행되어 왔고, 그래서 같은 숫자를 유지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약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체는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혈압을 자꾸 끌어올리는 그 무엇, 어머니의 콜레스테롤을 자꾸 다시 쌓이게 하는 그 무엇, 어머니의 인슐린이 잘 들어 오지 않게 만드는 그 무엇은 도대체 정확히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의학의 한 가지 이상한 침묵을 만나게 됩니다. 분과 의학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분과 의학은 자기 분과의 답만 가지고 있고, 그 답들이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합니다. 심장학은 혈관 안쪽의 변화를 말하고, 내분비학은 인슐린 신호 경로의 변화를 말하고, 신장학은 사구체의 변화를 말하지만, 이 변화들이 같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어떻게 같은 시기에 함께 일어나는지에 대한 통합된 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같은 시기에, 혈관과 인슐린과 사구체와 관절과 신경과 심장과 뇌가 동시에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면, 그 동시성을 만드는 공통된 한 사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분과 의학이 따로 진단하고 있는 노화와 만성질환의 발현들이 사실은 같은 한 사건의 다른 자리에서의 표면화라면, 그 사건의 본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의학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한 층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 층의 이름이 물리입니다.

자연 과학에는 위계가 있습니다. 물리학이 가장 아래에 있고, 그 위에 화학이 있고, 그 위에 생물학이 있습니다. 물리 법칙이 먼저 있고, 그 물리 법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화학 반응이 일어나며, 그 화학 반응 위에서 생명 현상이 가능해집니다. 이 위계는 부정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은 이 위계의 위쪽 두 층, 곧 생물학과 화학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어떤 분자가 어떤 분자에 결합해 어떤 신호를 켜는가, 어떤 효소가 어떤 반응을 촉매하는가, 어떤 유전자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가는 정밀하게 안 만큼 알지만, 그 분자와 효소와 단백질이 흐르는 통로가 어떻게 좁아지고 막히는가, 어떤 물리적 사건이 그 신호를 처음 켜고 끄는가에 대해서는 답이 비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빈 층을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화학과 생물학 위에 한 층을 더 쌓되, 그 층의 이름을 물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새 층 위에서 다시 보는 의학을 물리의학이라고 부릅니다. 물리의학은 기존 의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분과 의학이 정밀하게 밝혀낸 분자와 신호와 경로의 모든 발견을 그대로 받아 안되, 그 발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상위 한 층을 추가할 뿐입니다. 그 한 층이 추가되는 순간, 분과 의학에서 따로 보이던 노화와 만성질환의 발현들이 같은 한 가지 사건의 다른 자리에서의 표면화로 보이기 시작하고, 어머니가 매일 다섯 알의 약을 드시면서도 점점 나빠지는 이유가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이 장은 그 빈 층의 윤곽을 그리는 자리입니다. 먼저 혈압약과 콜레스테롤약과 당뇨약이 30년 동안 무엇을 해 주었고 무엇을 해 주지 못했는지를 살펴봅니다. 다음으로 분과 의학이 왜 그 한계를 넘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한 층이 비어 있게 되었는지를 풀어 봅니다. 그러고 나서 자연 과학의 위계에서 그 빈 층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 보고, 마지막으로 이 책이 그 곳에 무엇을 채우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이 장이 끝날 때, 어머니가 매일 다섯 알의 약을 드시면서도 점점 나빠지는 이유가 더 이상 신비가 아니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 책의 본격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혈압약·콜레스테롤약·당뇨약의 30년 한계

현대 의학의 가장 큰 자산 가운데 하나가 만성질환 치료제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발전해 온 혈압약·콜레스테롤약·당뇨약은 인류의 평균 수명을 연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던 많은 환자들이 약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뇌졸중으로 누워 지내던 많은 환자들이 약 덕분에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약들이 없었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부모님들 가운데 다수가 이 자리에 함께 계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약들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함께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약들이 만성질환의 본체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약을 매일 드시는 환자들의 혈압은 정상 범위 안에 있지만, 그 환자들의 미세혈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좁아집니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정상으로 유지되지만, 그 환자들의 동맥 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굳어집니다. 당화혈색소는 잘 관리되지만, 그 환자들의 신장과 망막과 신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손상됩니다. 약은 숫자를 잡아 두었지만, 본체는 그동안에도 천천히 진행되었습니다.

[도표 1] 만성질환 약물의 작용 자리와 본체의 관계

약물작용 자리잡아 주는 것잡아 주지 못하는 것
혈압약혈관 수축·이완 신호혈압 숫자미세혈관 벽의 미세석회 진행
콜레스테롤약간의 콜레스테롤 합성혈중 콜레스테롤동맥 벽의 미세석회 침착
당뇨약인슐린 분비·작용 신호혈당 숫자미세혈관 미세석회의 누적
공통신호 차원검사실 숫자미세석회 이중봉쇄의 진행

도표가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합니다. 세 종류의 약이 모두 신호 차원에서 작동하면서 검사실의 숫자만 잡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호 차원의 작동은 약을 먹는 동안에만 유지됩니다. 약을 끊으면 숫자가 곧 다시 오릅니다. 그리고 약을 먹는 동안에도, 신호 차원의 잡아 주기와는 별개로 미세혈관 차원의 본체는 천천히 진행됩니다. 이것이 환자가 매일 약을 먹는데도 시간이 갈수록 약의 가짓수가 늘어나는 이유이고, 같은 환자가 결국 합병증이라 부르는 사건들에 도달하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떠올려 봅시다. 욕조의 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바닥의 물을 부지런히 닦아 줍니다. 바닥은 잠시 마르지만, 욕조 위에서는 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닦는 손이 멈추는 순간 바닥은 다시 젖고, 시간이 갈수록 닦아도 닦아도 물은 점점 더 빨리 차오릅니다. 본체는 욕조 위쪽의 수도꼭지가 잠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의 만성질환 약물은 바닥을 닦는 일에 매우 능합니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에는 닿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약통에 알약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바닥을 더 빨리 닦기 위해 더 많은 손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다국적 임상 연구들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미국 국립심폐혈관연구소가 후원한 한 대규모 다년 추적 연구는 표준 혈압약 치료를 받는 4만 명이 넘는 고혈압 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잘 관리된 혈압 수치에도 불구하고 추적 기간 동안 심부전·뇌졸중·관상동맥 사건을 새로 겪는 것을 보고했습니다. 약은 혈압 숫자를 정상 범위로 끌어내렸지만, 그 환자들의 심혈관 사건이 충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미국심장학회 학술지에 발표된 또 다른 분석은 여덟 건의 다국적 임상시험을 합산한 결과로, 콜레스테롤약을 장기 복용하는 환자에서 동맥의 콜레스테롤성 침착은 줄어드는 한편 칼슘 침착은 오히려 진행되는 현상이 일관되게 관찰된다고 정리했습니다. 약이 혈중 콜레스테롤은 줄여 주었지만, 동맥 벽의 본체는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약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만들어진 약들은 그 자체로 큰 의학적 자산이고,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 주는 결정적 도구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약은 본체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만으로는 노화와 만성질환을 멈출 수 없고, 약만으로는 어머니가 평생 약을 끊을 수 없는 길에서 빠져나오실 수 없습니다. 본체를 건드리려면, 본체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의학이 보지 못한 빈 층

본체가 무엇인지를 묻는 순간, 분과 의학의 가장 깊은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분과 의학은 분과 안에서는 매우 정밀합니다. 심장학은 관상동맥의 어느 지점에 어떤 종류의 플라크가 있는지를 밀리미터 단위로 알아내고, 내분비학은 인슐린 신호 경로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단백질의 인산화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분자 단위로 알아냅니다. 신장학·신경과·정형외과·종양학 모두가 같은 정밀함으로 자기 분과의 본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비어 있습니다. 분과 사이의 공통 상류가 비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60대 후반의 어머니는 지금 고혈압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콜레스테롤이 높고, 동시에 당뇨병의 경계에 있고, 동시에 무릎 관절이 시리며, 동시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동시에 작년부터 깜빡깜빡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하십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같은 시기에 이렇게 많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면, 그 동시성을 만드는 어떤 공통된 상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의학은 이 동시성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심장내과 의사는 혈압을, 내분비내과 의사는 혈당을, 정형외과 의사는 무릎을, 신경과 의사는 잠과 기억을 따로따로 다룰 뿐, 이 모든 사건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같은 시기에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않습니다.

[도표 2] 분과 의학의 한계와 빈 상류의 위치

내용분과 의학의 답
하류특정 장기의 분자·세포 변화정밀한 답을 가짐
중류특정 장기의 임상 표현정밀한 답을 가짐
상류여러 장기의 동시 발현 공통 본체비어 있음
최상류동시 발현을 만드는 물리적 사건비어 있음

도표의 위쪽 두 층이 분과 의학에서 비어 있는 자리입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여러 노화와 만성질환의 발현이 같은 시기에 함께 진행되는 그 동시성, 그리고 그 동시성을 만들어 내는 물리적 사건. 이 두 층에 대한 답이 분과 의학에는 없습니다. 답이 없는 이유는 분과 의학이 게으르거나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분과 의학은 자기 분과의 정밀함을 위해 자기 분과 안에 머물도록 구조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장내과의 모든 학회와 모든 학술지와 모든 수련 과정은 심장 안에서 정밀함을 추구합니다. 다른 분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과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통 상류는 어느 분과의 책임도 아니고, 그래서 어느 분과도 그 자리를 채우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분과 사이의 공통 상류가 비어 있다는 것은, 그 상류에 사건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건은 그 자리에 분명히 있는데, 다만 그 사건을 보는 분과가 없을 뿐입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혈압과 혈당과 콜레스테롤이 동시에 흔들리는 그 사건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그 사건을 일으키는 무엇이 분명히 있는데, 그 무엇을 다루는 분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 빈 자리가 바로 이 책이 들어가려는 자리입니다.

인체를 한 곳에 모아 보는 시각의 출발점은 19세기 프랑스의 생리학자 베르나르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인체가 외부 환경과 끊임없이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내부 환경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정리한 내부 환경 개념은 후일 항상성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고, 인체를 분과로 나누어 보는 시각이 아니라 한 곳에 모아 보는 시각의 첫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의 그 통찰은 20세기의 분과 의학이 정밀함의 길을 따라 발전하는 동안 점점 잊혔고, 21세기의 분과 의학은 다시 그 통찰을 잃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잃어버린 그 통찰을 다시 채우는 일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물리학이 화학을 낳고, 화학이 생명을 낳는다

의학이 왜 이 빈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자연 과학의 위계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짚어야 합니다. 자연 과학은 위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학이 가장 아래에 있고, 그 위에 화학이 있고, 그 위에 생물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은 생물학의 한 갈래입니다. 이 위계는 임의의 분류가 아니라, 한 층이 다른 층을 가능하게 한다는 인과적 관계입니다. 물리 법칙이 먼저 있어야 화학 반응이 가능하고, 화학 반응이 먼저 있어야 생명 현상이 가능합니다.

[도표 3] 자연 과학의 위계

대상핵심 질문의학 안에서의 자리
생물학세포·조직·기관어떤 분자가 어떤 신호를 켜는가현대 의학의 주요 자리
화학분자·이온·반응어떤 분자가 어떤 분자와 결합하는가약리학의 주요 자리
물리학흐름·기울기·구조왜 그 분자가 그 자리로 흐르는가비어 있는 자리

도표의 가장 아래 칸이 의학 안에서 비어 있는 자리입니다. 어떤 분자가 어떤 신호를 켜는가는 현대 의학이 정밀하게 알지만, 그 분자가 왜 그 곳으로 흐르는가, 그 흐름이 어떻게 막히는가, 막힌 곳에서 어떤 물리적 사건이 일어나는가는 의학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빈 칸의 위치가 결정적입니다. 위계의 가장 아래 층이고, 그래서 그 위의 모든 층의 사건이 그 위에서 일어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머니의 미세혈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분과 의학으로 본다고 가정합시다. 생물학적으로는 혈관 내피 세포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고 어떤 단백질을 발현하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화학적으로는 어떤 분자가 어떤 분자와 결합하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미세혈관 안쪽에 칼슘과 인이 결합한 미세 결정이 천천히 침착되면서 그 자리의 흐름을 좁히고 있다는 물리적 사건. 그 사건은 분자 차원의 신호 변화도 아니고, 화학 반응의 결과도 아닌, 흐름과 통로와 침착이라는 물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물리적 사건이 그 위의 모든 화학 반응과 생물학적 신호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왜 의학이 이 자리를 보지 못했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대 교육은 해부학에서 시작해 생리학으로 가고, 거기서 병리학·약리학·임상의학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길이 분자와 신호와 경로의 정밀함을 향해 흐릅니다. 그 길에서 흐름과 기울기와 침착이라는 물리적 사건을 정식으로 다루는 자리가 없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분과 전공에 진입하면, 더더욱 자기 분과의 정밀함 안에 갇히게 됩니다. 평생 의학을 배우고 평생 환자를 보아 온 의사조차도, 자기 분과 너머에 어떤 물리 층이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들을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진단은 의학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분과 의학은 자기 영역에서 인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왔고, 그 정밀함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를 분명히 하려는 것입니다. 의학이 닿지 못한 곳이 한 군데 있고, 그 곳이 바로 자연 과학 위계의 가장 아래 층이며, 그래서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한 분과 의학은 자기 한계 안에서 같은 한계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이 채우려는 빈 층

이제 이 책이 무엇을 하려는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의학에 한 층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화학과 생물학 위에, 그러나 그 두 층 아래의 자리에, 물리라는 층을 정확히 끼워 넣으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층 위에서 다시 보는 의학을 물리의학이라고 부릅니다.

물리의학이 다루는 자리는 단순합니다. 인체 안에서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 그 흐름이 기울기 위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 그 기울기를 매개체가 따라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매개체가 통로 위에서만 흐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흐름·기울기·매개체·통로. 이 네 단어가 물리의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네 단어가 노화와 만성질환의 본체를 설명합니다. 분과 의학이 따로따로 진단해 온 본태성 고혈압·제2형 당뇨병·만성콩팥병·신경퇴행성 질환·그리고 노화 그 자체가, 사실은 같은 한 가지 흐름의 사건의 다른 자리에서의 표면화임을 물리의학은 보여 줍니다.

[도표 4] 분과 의학과 물리의학의 시선 차이

항목분과 의학물리의학
시선 자리특정 장기·특정 분자인체 전체의 흐름
주된 도구약물·수술·검사흐름·기울기·통로 회복
시간 차원현재 발현 중심상류 사건과 누적 시간
만성질환관여러 개의 다른 질환한 가지 사건의 다른 발현
둘의 관계하류의 정밀함상류의 통합

도표가 분명히 하는 것은, 물리의학이 분과 의학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과 의학은 하류의 정밀함을 다루고, 물리의학은 그 하류 사건들이 모이는 상류의 통합을 다룹니다. 두 영역은 서로 다른 영역이고, 두 영역 모두 의학에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무릎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정형외과의 정밀함이 필요하고, 어머니의 혈압을 잡기 위해서는 심장내과의 정밀함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어머니의 무릎과 혈압과 혈당과 잠과 기억이 같은 시기에 함께 흔들리고 있는 그 동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과 너머의 한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 자리가 물리의학입니다.

이 책이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약도 아니고 새로운 수술 기법도 아닙니다. 새로운 한 가지 시선입니다. 분과 너머의 한 자리에서 한 사람의 몸 전체를 한 번에 보는 시선이고, 그 시선 위에서 노화와 만성질환의 동시성과 누적 시간을 함께 다루는 시선입니다. 이 시선이 추가되는 순간, 분과 의학에서 따로 보이던 만성질환들이 같은 한 가지 사건의 다른 자리에서의 발현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약을 평생 먹어도 낫지 않는 이유가 비로소 또렷해집니다. 본체가 보이기 시작하면, 본체를 건드릴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립니다.

물리의학은 이미 세상에 있던 사실들을 새로운 자리로 옮겨 놓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자연 과학의 위계는 19세기 프랑스의 생리학자들이 이미 정리해 두었고, 흐름과 기울기에 관한 물리 법칙은 19세기 물리학과 화학이 이미 정식화해 두었으며, 칼슘과 인의 침착에 관한 분자 기전은 21세기 의학이 이미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이 하는 일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실들을 한 자리에 모아 분과 사이의 빈 상류를 채우는 일입니다. 한 자리에 모인 그 사실들이 비로소 한 가지 상위 본체의 윤곽을 그려 내고, 그 본체의 이름을 이 책은 미세혈관 이중봉쇄라고 부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분과 의학의 한 가지 분명한 한계를 보았고, 그 한계 너머에 한 층의 빈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그 빈 자리에 들어갈 새로운 시선의 이름을 물리의학이라고 정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시선이 인체 안에서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인체의 어떤 풍경이 이 시선 위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지를 살펴봅니다. 한 가지 단순한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흐르면 살고, 막히면 죽는다. 그리고 막히는 곳은 한 군데, 막는 물질도 한 가지로 수렴합니다. 그곳이 미세혈관이고, 그 물질이 미세석회입니다. 다음 장의 문이 그 한 줄 위에서 열립니다.

참고문헌

[1] Bernard, C. (1865).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Paris: J.B. Baillière et Fils.

[2] Cannon, W. B. (1932). The Wisdom of the Bod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3] ALLHAT Officers and Coordinators for the ALLHAT Collaborative Research Group. (2002). Major outcomes in high-risk hypertensive patients randomized to angiotensin-converting enzyme inhibitor or calcium channel blocker vs diuretic: The Antihypertensive and Lipid-Lowering Treatment to Prevent Heart Attack Trial (ALLHAT). JAMA, 288(23), 2981–2997.

[4] Puri, R., Nicholls, S. J., Shao, M., Kataoka, Y., Uno, K., Kapadia, S. R., Tuzcu, E. M., & Nissen, S. E. (2015). Impact of statins on serial coronary calcification during atheroma progression and regression. Journal of the American College of Cardiology, 65(13), 1273–1282.

[5] Yusuf, S., Hawken, S., Ôunpuu, S., Dans, T., Avezum, A., Lanas, F., McQueen, M., Budaj, A., Pais, P., Varigos, J., Lisheng, L., & INTERHEART Study Investigators. (2004). Effect of potentially modifiable risk factors associated with myocardial infarction in 52 countries (the INTERHEART study): Case-control study. The Lancet, 364(9438), 937–952.

[6] Roth, G. A., Mensah, G. A., Johnson, C. O., et al. (2020). Global burden of cardiovascular diseases and risk factors, 1990–2019: Update from the GBD 2019 Study. Journal of the American College of Cardiology, 76(25), 2982–3021.

[7] Demer, L. L., & Tintut, Y. (2008). Vascular calcification: Pathobiology of a multifaceted disease. Circulation, 117(22), 2938–2948.

[8] Hofbauer, L. C., Brueck, C. C., Shanahan, C. M., Schoppet, M., & Dobnig, H. (2007). Vascular calcification and osteoporosis: from clinical observation towards molecular understanding. Osteoporosis International, 18(3), 251–259.

[9] Thompson, B., & Towler, D. A. (2012). Arterial calcification and bone physiology: Role of the bone-vascular axis. Nature Reviews Endocrinology, 8(9), 529–543.

[10] López-Otín, C., Blasco, M. A., Partridge, L., Serrano, M., & Kroemer, G. (2023). Hallmarks of aging: An expanding universe. Cell, 186(2), 243–278.

『물리의학의 시대 선언』 시리즈
댓글 0

    관련 기사

    원전 서재| 2026.07.07 10

    세포 안의 역설: 칼슘은 왜 100나노몰인가

    DTDMC Lab 연구소
    원전 서재| 2026.07.06 9

    아프지 않은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DTDMC Lab 연구소
    원전 서재| 2026.07.06 9

    범인은 암이 아니다

    DTDMC Lab 연구소